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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공(副正公) 휘(諱) 문간(文幹) 묘비문(墓碑文)

 

공(公)의 휘(諱)는 문간(文幹)이며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본관(本貫)은 전의(全義)로 세계(世系)는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국통일(三國統一)에 공(功)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러 전산후(全山侯)에 봉(封)해졌으며 시호(諡號) 성절(聖節)인 휘(諱) 도(棹)가 그 시조(始祖)이다. 이후로 높은 벼슬이 대대(代代)로 끊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칠세(七世)에 이르러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 지례부사(知禮部事) 중서시중문하평장사(中書侍中門下平章事)를 지낸 동암수공(東巖叟公) 휘(諱) 천(仟)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몽고(蒙古)에 항전(抗戰)하여 유공(有功)한 사적(事蹟)이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며 1992년도 우리 해군(海軍)이 국산잠수함(國産潛水艦) 제일호(第一號)를 건조(建造)하여 진수(進水)할 때 함명(艦名)을 공(公)의 휘자(諱字)를 따 “이천함”이라 명명(命名)한 바 이는 공(公)의 전공(戰功)을 후세(後世)에 길이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동암수공(東巖叟公)이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두니 그 계자(季子)인 선부전서공(選部典書公) 휘(諱) 자화(子華)가 처음으로 삼파(三派)로 분파(分派)된 계파(季派)의 파조(派祖)이며 바로 공(公)의 증조고(曾祖考)이다. 조고(祖考)는 전법총랑공(典法摠郎公) 휘(諱) 득영(得榮)이고 고(考)의 휘(諱)는 구직(丘直)으로 조선조(朝鮮朝)에 처음으로 들어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참찬의정부사(叅贊議政府事)에 추증(追贈)되고 비(妣)는 낙안김씨(樂安金氏)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휘(諱) 인관(仁琯)의 녀(女)로 현덕(賢德)하였으며 아들 사형제(四兄弟)를 두니 공(公)은 그 계자(季子)로 태어났다. 모부인(母夫人)은 백세(百歲) 장수(長壽)에 장자(長子) 효정공(孝靖公) 휘(諱) 정간(貞幹)이 “노래자(老萊子)의 희(戱)”가 있었으므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이 가상(嘉尙)히 여겨 특별(特別)히 포상(褒賞)하는 은전(恩典)을 내리시고 김씨(金氏)를 정대부인(貞大夫人)에 봉(封)하고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 여덟 자를 손수 써주시니 온 가문(家門)의 큰 영광(榮光)이었다. 공(公)은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태종십년(太宗十年:1410) 호조좌랑(戶曹佐郎)에 보임(補任)되고 동십오년(同十五年:1415)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때 금란관(禁亂官)으로 왜관(倭館)에 나갔다가 그 이듬해 풍저창사(豊儲倉使)로 승임(陞任)되었으며 동십칠년(同十七年:1417)에는 경기도(京畿道) 가평(加平)에 설치(設置)된 잠소(蠶所)에 감독관(監督官)으로 파견(派遣)되었다가 그해 10월에 경력(經歷)으로 임금의 강무(講武)에 수종(隨從)한 일로 왕(王)이 유의(襦衣)를 하사(下賜)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마지막으로 벼슬길을 사양(辭讓)하고 세속(世俗)의 명리(名利)를 떠나 오직 효정공(孝靖公)을 비롯한 세 형(兄)과 더불어 대왕(大王)께서 어필(御筆)로 하사(下賜)한 충효인경(忠孝仁敬)의 성지(聖旨)를 가헌(家憲)으로 받들어 이를 수호(守護)하고 전승(傳承)하는 과업(課業)에 신명(身命)을 다바쳤다. 그러나 드러난 명문(名門)에 벼슬을 지낸 신분(身分)으로 기록(記錄)으로 남을만한 행검(行檢)과 사적(事蹟)들이 수없이 많을 터이나 세대(世代)가 너무 멀리 지났으며 이후 불행(不幸)하게도 여러번의 병란(兵亂)을 겪으면서 내려온 문적(文籍)들이 거의 없어져 공(公)의 생졸연대(生卒年代)와 경력(經歷)의 차서(次序) 등을 자세(仔細)하게 찾을 수 없어 애석(哀惜)하기 그지없다.

배(配) 숙인(淑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재신(宰臣) 휘(諱) 을의(乙義)의 녀(女)로서 딸 셋을 낳았으며 후배(后配) 숙인(淑人)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지주사(知奏事) 휘(諱) 보린(寶麟)의 녀(女)로 일남일녀(一男一女)를 두었다. 아들 계손(季孫)은 세종조(世宗朝)에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냈으며 장녀(長女)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의령인(宜寧人) 남지(南智)에게 이녀(二女)는 상주인(尙州人) 현감(縣監) 김신지(金愼智) 삼녀(三女)는 평산인(平山人)으로 현감(縣監) 신계성(申繼性) 사녀(四女)는 역시(亦是) 현감(縣監)인 여흥인(驪興人) 민처령(閔處寧)에게 각각 출가(出嫁)하였다.

이후 후손(後孫)들이 크게 번창(繁昌)하고 세덕(世德)이 빛을 더해 육백여년(六百餘年)을 지나는 동안 본거(本據) 서울 궁동(宮洞)을 비롯하여 영남(嶺南)으로 달성(達城) 고령(高靈) 언양(彦陽) 경기지방(京畿地方)에 부천(富川) 용인(龍仁) 평택(平澤) 호서(湖西)의 청주(淸州) 영동(永同) 해서(海西)에 벽성(碧城) 옹진(甕津) 등지(等地)로 널리 퍼져 각기(各其) 그 지역(地域) 곳곳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누대(累代)로 세거(世居)하면서 과환(科宦)과 학덕(學德) 충훈(忠勳) 절행(節行)이 끊임없이 이어져 문과(文科) 이십오위(二十五位) 무과(武科) 삼십육위(三十六位) 사마시(司馬試) 오십구위(五十九位) 등(等) 급제자(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으며 양무공신(揚武功臣)으로 불조지묘(佛祧之廟) 일위(一位)와 원종공신(原從功臣) 십오위(十五位)가 녹훈(錄勳)되고 학덕(學德)으로 추중(推重)되고 절행(節行)으로 정려(旌閭)된 인원(人員)이 수십위(數十位)에 이른다. 각처(各處)에 산재(散在)한 재각(齋閣) 사당(祠堂) 정사(精舍) 등 문화유적(文化遺蹟)과 간행(刊行)된 수많은 문집(文集) 등 저작물(著作物)은 그간에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말해주는 좋은 증표(證票)라 할 것이다. 근현대(近現代)에 들어와 정치(政治)와 관계(官界)를 비롯하여 법조(法曹) 산업(産業) 교육(敎育) 언론(言論) 문예(文藝) 등 각계각층(各界各層) 다방면(多方面)에 진출(進出)하여 국가(國家)와 사회(社會)에 크게 공헌(貢獻)하여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진 인재(人材)가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나와 종문(宗門)의 영광(榮光)을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어왔다. 이는 오로지 공(公)의 태산(泰山)같이 높게 쌓은 공덕(公德)의 여음(餘蔭)으로 마땅히 후손(後孫)들로서 감은보본(感恩報本)의 도리(道理)를 잠시(暫時)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처음 경기도 부평(富平) 수탄리(水呑里) 현 서울시 구로구 궁동 산(山) 10의 20에 위치(位置)해 있었으나 이 일원(一圓)이 서울시(市)의 도시계획(都市計劃)에 의(依)한 용도지역지구지정(用度地域地區指定)과 이에 수반(隨伴)한 대내외(對內外) 제반(諸般) 여건(與件)으로 분묘(墳墓)를 영구(永久)히 수호보존(守護保存)할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러 부득이(不得已) 종의(宗議)를 거쳐 청룡산(靑龍山) 정기(精氣)이런 이곳 언덕에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배위(配位)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쌍분(雙墳)으로 후배(后配)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합분(合墳)으로 을유(乙酉) 2005년 5월에 면례(緬禮)하였다. 이에 묘도환경(墓道環境)을 일신(一新)하고 비(碑)를 새로 세우기로 하면서 그 비문(碑文)을 불초(不肖)에게 맡기니 감(敢)히 거역(拒逆)하지 못하고 삼가 전래(傳來)의 가전(家傳) 보첩(譜牒)과 사료(史料)를 의용(依用)하여 위와 같이 기술(記述)하고 이에 명(銘)을 지어 이으니

 

청룡산(靑龍山)에 솟은 일월(日月) 한강수(漢江水)에 조요(照耀)할 제

충효세업(忠孝世業) 어떠하뇨 지키시고 이으셨네

높이 쌓은 어진 음덕(蔭德) 후손번영(後孫繁榮) 이룩했소

천장지비(天藏地秘) 이 언덕은 공(公)의 체백(體魄) 모신 성역(聖域)

추원보본(追遠報本) 지성(至誠)으로 영원무궁(永遠無窮) 받들리라

 

세을미(歲乙未) 서기2015년 6월  일

십칠대손(十七代孫) 국로(國魯) 근기(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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